카레 온 더 보더 - 2013 제13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13) 읽다

* 하성란, 권여선, 김이설, 박솔뫼, 손홍규, 윤이형, 은희경, 조해진


"이 모든 게 다 식상하다는 듯한, 앞으로도 크게 변할 게 없을 거라는 듯한, 겪어보지 않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막내가 입을 꽉 다물었다. 그녀도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는 일도 술을 마시는 일도 남자를 사귀는 일도 다 시큰둥하던 시절, 에어로빅 학원에서 그녀는 사오십대 아주머니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딸뻘인 그녀를 아주머니들은 "선생님"하고 불렀다. 단물 빠진 냄새가 섞인 시금털털한 입 냄새를 풍기곤 했다. "선생님은 젊어서 몰라. 별거 없어. 진짜 별거 없어." 그렇게 말할 때면 아주머니들의 눈빛은 누군가 다 훔쳐가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창고 같은 눈빛이 되곤 했다."   - 18P


"영경은 계속 읽어나갔다.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노보드보로프라는 혁명가는, 톨스토이에 따르면, 이지력은 남보다 뛰어났지만 자만심 또한 굉장하여 결국 별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그 까닭인즉, 이지력이 분자라면 자만심은 분모여서 분자의 숫자가 아무리 크더라도 분모의 숫자가 그보다 측량할 수 없이 더 크게 되면 분자를 초과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125P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영경은 여전히 수환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인생에서 문가 엄청난 것이 증발되었다는 것만은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영경은 계속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다른 환자들의 병실 문을 함부로 열고 돌아다녔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 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 139P


"처음에는 남편이 꾸리다 만 짐을 내동댕이쳤다. 남편의 옷이란 옷은 찢어발기고, 속옷은 가위로 잘디잘게 오렸다. 남편의 신발을 칼로 난도질하고, 남편이 한 번이라도 입을 댔던 컵이나 그릇을 집어 던져 깨부쉈다. 난장판이 된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 년이나 살았던 집인데 남편의 것은 그게 전부였다. 고작 그뿐이어서 비참했다."   - 150P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관객이 객석 중앙에 모여 앉았다. 외투를 손에 들거나 어깨에 걸치고 굳은 표정의 사람들은 여전히 추운 얼굴로 앉아있다. 자리를 바꾸어도 그 표정으로 말이다. 남아 있는 관객들은 적은 인원 탓인가 왠지 모를 의무감으로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 감독에게 있는 것은 책임감이니까 찍는 사람의 책임에 대해 말을 하고 우리에게는 손이 있으니까 손이 있는 사람들이 다였으니까 손을 들어 질문을 하고 영화음악을 부른 포크 뮤지션은 고작 몇 명을 앞에 두고 영화음악을 다섯 곡쯤 부르고 그렇게 어정쩡한 시간이 간신히 지나고, 그 시간이 얼마나 어정쩡했냐면 마지막 질문이 감독님은 올해 나온 영화 중 가장 재미있게 본 게 무엇입니까였는데 그걸 묻는 사람은 하나도 안 궁금하다는 표정이었고 감독은 하하 그게 제 영화라고 해도 될까요라고 말했고 그 시간의 어정쩡함은 그 정도의 어정쩡함."   - 219P


"대파를 심었는데 양파가 날 수도 있나?
직원은 배시시 웃었다.
공장에서 포장할 때 더러 대파 씨와 양파 씨가 바뀌기도 합니다.
그날 밤 그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금방 잠이 들었다가 깼는지 잠기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는 첫 마디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파를 심었는데 양파가 날 수도 있다네.
…….
알아들었는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간다면서요, 아주 간다면서요?
……."   - 252P


"이따금 고양이와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소년은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 안의 비밀 은신처에 들어가 울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세상은 수치심과 절망뿐이다. 소년은 머리 위의 커다란 더미를 버티고 있는 장작 하나를 빼내 무너뜨림으로써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끝내버리기로 결심한다. 순간 주머니 속의 과자가 기억났으므로 일단 그것을 꺼내서 먹는다. 그런 다음 장작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고양이가 다가와 젖은 뺨을 핥기 시작했을 때 소년은 그 축축하고 까끌까끌한 감촉에 스르르 눈을 감고 만다. 그것은 소년의 비통한 계획을 철회할 만큼 충분히 따뜻하다. 소년은 알고 있다. 고양이가 핥는 것은 소년의 눈물이 아니라 입가에 붙어 있는 과자 가루이다. 훗날 소년은 이렇게 쓴다. '진정 순수하게 사랑받고 싶거든 주머니 안에 과자 부스러기를 조금쯤 갖고 있는 편이 좋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 291P


"밤이면 엄마는 식탁에 앉아 싸구려 와인을 마셨다. 엄마는 레몬 오일로 식탁을 닦다가 다리 안쪽에서 메이드 인 핀란드라는 글자를 발견한 이후 그 식탁을 더욱 마음에 들어했다. 북구 동화 속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운하를 건너가는 이야기와 핀란드의 숲과 운하에 가보고 싶었다는 어린 시절 꿈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취한 엄마는 잘 웃고 말도 많아졌다. 식탁을 판 여자가 그 무뚝뚝한 남자와 결혼을 했는지, 이제는 어떤 식탁에서 밥을 먹는지 궁금하다고 말하곤 했다. 엄마는 여자의 전 남편이 핀란드 사람이었다고 멋대로 추측했다. 그 식탁은 전 남편의 물건이었고 그 이유로 새 남자가 팔아치우라고 명령했다는 거였다. 그 남자도 이해가 가. 생각해봐라. 전 남편이랑 함께 그 식탁에 앉아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겠니. 오랫동안 밥 먹은 사람은 쉽게 잊지 못하는 거야."   - 3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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