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습환자 (2014) 읽다

* 최인호


"언제나 그들의 곁에선 약품 냄새가 나고 있었고, 그들의 희고 투명한 손가락은 햇살 속에서 메스처럼 번득이곤 했다. 그들의 깨끗이 세탁한 가운을 보노라면 주사액이 통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정밀성 같은 것을 느껴야 했다. 때문에 나는 어느 의사의 가운 앞소매쯤에 머큐롬 한 방울이 얼룩진 흔적을 보았을 때, 지독한 쾌감을 맛보았다. 굉장히 예쁘고 성장한 여인의 옷차림 어딘가에서 가느다란 실밥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아슬아슬한 승리감이 가슴에 충만되기 시작했다."   - 견습환자, 11P



"나이답지 않게 근육, 근육이 비상하게 발달된 계집애. 검은 살결 밑에 풍만하고도 거대한 갈색 정욕을 비장하고 있는 계집애. 저 노골적이고, 피로에 젖은 눈매로 담배를 뿜어대는 귀엽고도 작은 입술을 보라. 슈미즈 속으로 알 밴 게처럼 터져나올 듯한 유방과, 육감적인 어깨의 선.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범란하는 강처럼 엄청난 둔부. 짧은 다리 위에 저처럼 무르익은 과일들을 지탱하고 있는 질기디질긴 본능. 동물적인, 너무나 동물적인 음탕하게 빛나는 눈."   - 2와 1/2, 36P



"다음다음날 오후쯤 한 여인이 이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방안에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을 발견했다. 매우 놀라서 경찰을 부를까고도 생각했지만, 놀란 가슴을 누르며 온 방안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는데 틀림없이 그녀가 없는 새에 누군가가 들어온 것은 사실이긴 했지만 자세히 구석구석 살펴본 후에 잃어버린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자, 안심해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잃어버린 것이 없는 대신 새로운 물건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물건은 그녀가 매우 좋아했던 것이었으므로 며칠 동안은 먼지도 털고 좀 뭣하긴 하지만 키스도 하긴 했다. 하지만 나중엔 별 소용이 닿지 않는 물건임을 알아차렸고 싫증이 났으므로 그 물건을 다락 잡동사니 속에 처넣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그 방을 떠나기로 작정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메모지를 찢어 달필로 다음과 같이 써서 화장대 위에 놓았다.

여보. 오늘 아침 전보가 왔는데 친정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거예요. 잠깐 다녀오겠어요. 당신은 피로하실 테니 제가 출장 갔다고 할 테니까 오시지 않으셔두 돼요. 밥은 부엌에 차려놨어요."   - 타인의 방, 98P



"물론 우리가 기성복을 사입으려고 양복 총판매장이라는 데를 들르면 소위 특대라는 사이즈의 기성복이 있는 것처럼 특대의 여인들이 거리엔 간혹 있었다. 나는 막연하게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이미 재단되고 가봉되어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는 기성복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벌이라든지 미모라든지 가문이라는 것은 양복 뒤에 붙어 있는 상표와 가격품 표시에 불과한 셈인 것이다. 실로 거리에는 기성복이 걸어다니고 있는 셈이었다. 사람들은 용케도 자기의 규격에 알맞은 옷을 걸치고 있는 것처럼 기성복 아닌 기성녀를 골라잡고 그리고 고만고만한 애들을 낳고 그야말로 행복에 겨워 낄낄대는 것이었다."   전람회의 그림1, 156P



"물론 차는 구두보다 고급이긴 했다. 그러나 살아 있지 않은 물건이라는 면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람들의 대갈통을 주무를지언정 죽어 있는 것과는 상대하지 않을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남의 차를 향해 물줄기를 난사할 바에는 차라리 목욕탕에 벌거벗고 들어가 더운물을 끼얹고는 남의 더운 살덩어리에서 때 벗겨내는 일을 할 작정이었다. 그것은 피가 통하는 물건을 만지는 일이니까.
마치 내가 남녀가 그 짓을 하는 야비한 그림책을 팔지언정 개와 말이 사람과 더불어 그 짓을 하는 그림책은 절대로 팔지 않은 것처럼."   - 즐거운 우리들의 천국, 284P


"아버지는 그 자전거를 사기 위해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았으며 그래도 돈이 모자라 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모자라는 돈 대신 단원들이 원한다면 날마다 원숭이들에게 먹이를 먹이고 말의 갈기를 빗질해주겠소. 그래도 부족하면 서커스를 선전하는 현수막을 들고 단원들이 떠나는 새로운 동네로 나가 매일같이 춤을 추겠소. 만세도 부르겠소."
그날 내가 아버지가 보여준 기적으로 자전거를 경품으로 탄 후 원형무대에서 자전거에 올라타 울면서 맴을 돌고 있을 때 아버지는 천막의 한구석에서 몰래 숨어 보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하나님, 이제 저 아이는 어디든 제가 가고 싶을 때 달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위대한 유산, 324P



"그는 여행을 떠나고 나서부터 아름다운 풍경이나 거대한 사막, 선인장, 눈 덮인 요세미티 공원의 절경을 볼 때면 언제나 그런 감상적인 비애를 느끼곤 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 깊고 푸른 밤, 3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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